앞서 우유 편에서도 보셨다시피 저는 비건이 되진 못하지만 그래도 비건식 라이프 스타일을 일부만이라도 받아들여보려고 하는 중입니다. 요즘은 먹는 것 말고 입고 바르는 것에서도 비건 제품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아졌지요. 그 중에서도 저를 제일 고민하게 만드는 건 '가죽'입니다 🤔
비건 레더래매...
의류도 요즘은 '비건 레더'라는 것이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많아진 거 같지만 잘 보면 비건 레더라고 해놓고 사실은 PVC, PU 같은 석유화학물 소재인 경우가 많더라구요😡 물론 개중에는 종이, 버섯, 사과 등의 식물성 재료를 활용해 가죽의 질감을 낸 진짜 비건 레더라고 할만한 제품도 있습니다만, 가뭄에 콩 나는 수준이고, 대부분이 잘 보면 비건이라 이름 붙이기 민망한 수준의 '레쟈' 제품입니다. 비건이라는 단어를 '동물권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만 해석해서 동물 가죽은 아니니까 이건 비건 레더다, 이런 논리인데 사실 진짜 중요한 건 자연친화적이어야 한다는 점 아닐까요?
포기하기 어려운 천연 가죽의 튼튼함
다양한 섬유 소재의 발달로 '패스트 패션'이라는 기형적인 소비 패턴까지 즐길 수 있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천연 가죽이 시장에 남아있는 이유는 관성, 멋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튼튼함'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제 지갑 이야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없는데요. 저에게는 대학 들어가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선물 받은 가죽 지갑이 하나 있었습니다. 이 지갑은 약 20년간 저를 따라 여기저기 세계 여행까지 하며 맹활약을 해왔는데요. 선물해주신 당사자인 부모님이 너무 오래 쓴다, 제발 그놈의 것 좀 그만 쓰라며 (잘 써도 뭐라그래) 다른 지갑을 사주실 정도로 주구장창 그 지갑을 썼었더랬습니다. (이 지갑은 가족들의 성화에 못이겨 최근 폐기했습니다 😭) 그런데 잘 만든 가죽제품은 그 지경으로 열심히 써도 찢어지거나 부숴지지 않더라구요. 스티치 부분의 실이 먼저 삭아 빠질 지경이 되긴 했습니다만, 가죽 자체는 문제가 없었어요.
나보다 두 배는 오래 산 핸드백 이야기
저에게는 가죽 이야기를 하자면 또 빼놓을 수 없는 물건이 있습니다. 홍콩 여행을 갔을 때 현지 빈티지 가게에서 사온 와인색 박스백(위 사진)인데 이게 무려 1940년대에 피렌체에서 만들어진 제품입니다. 가게 사람들이 준 정보가 정확한 거라면 무려 여든살 정도 되시는... 세계 2차 대전 즈음에 태어난 가방인 것입니다. 역시나 이탈리아는 가죽 공예의 나라... 지금도 잔기스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튼튼해서 손잡이만 수선하면 삼십년도 더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이쯤되면 제대로 된 가죽 제품을 잘 관리해가며 오래 쓰는게 어정쩡한 비건 레더를 사는 것보다 더 친환경적인 거 아닐까 싶어집니다. 가죽을 가공할 때 쓰는 약품이 환경에 안 좋긴 하지만 한번 가공해 만든 제품을 백년 동안이나 쓸 수 있다면야 계산이 달라지지 않겠어요?
정답은 이미 가지고 있는 가죽 제품이나 빈티지 마켓이 아닐까?
앞서 주구장창 썼던 가죽 지갑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대체품으로 천이나 비닐 소재의 지갑들도 써보긴 했어요. 그런데 최소 반년 정도 되니 눈에 띄게 낡아지거나 모서리가 너덜하게 찢어지더라구요. 들고 다니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그 지갑들은 재활용도 어려워 그냥 폐기하게 되었는데 반년에서 일년에 한번씩 지갑을 버리고 있자니 너무 고통스러웠습니다. 돈도 버리고 환경도 망치는 기분!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이미 갖고 있는 가죽 제품'들을 잘 손질해가며 쓰거나, 꼭 필요하면 제 와인색 박스백처럼 빈티지 마켓에서 튼튼한 가죽 제품을 사서 쓰는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환경에 좋은 선택이라는 거에요.
힘내라, 진짜 비건 레더!
물론 동물의 가죽을 벗겨 만든다는 점에서 천연 가죽의 한계도 확실히 있기 때문에, 진짜 비건 레더라고 부를만한 제품들이 가죽 제품보다 환경 오염을 덜 시키면서 가죽만큼이나 튼튼하고 오래 쓸 수 있는 소재로 성장해준다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나오는 진짜 비건 레더들은 그 제조 공정이 얼마나 환경에 부담을 덜 주는지, 얼마나 오래 잘 쓸 수 있는지 미지수인 부분이 있어서 저는 아직 선택하고 있지 않은데요. 당장 가지고 있는 가죽 제품들을 오래오래 소중하게 쓰면서 비건 레더의 발전을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있는 가죽 잘 쓰는 방법
자, 그러면 가죽 제품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을 것인가. 가죽 제품들을 오래 쓰려면 약간의 요령이 필요합니다. 가죽 신발의 경우 가죽이 줄어들어 신기 어려워지는 일을 막기 위해 신발 모양을 유지해주는 '슈트리'를 꼭 장만하는게 좋지요. 빈티지 슈즈 구입에 관심이 있다면 발볼을 넓혀주는 '제골기' 구입도 생각해볼만 합니다. 자기 발 사이즈에 맞는 슈트리와 제골기는 평생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건이고 장기적으로 신발 구입을 줄여주는 효자템이랍니다. 그리고 옷이든 가방이든 구두든 가죽 제품들은 가끔 전용 로션을 발라주는게 좋은데 정 귀찮으면 그냥 얼굴에 쓰는 로션이나 핸드로션을 발라줘도 됩니다. 가죽도 일종의 피부(...)이기 때문에 로션으로 유수분을 채워줘야 좋은 컨디션으로 오래 쓰는데 도움이 됩니다. 피부라고 하니 또 징그럽네요. 역시 진짜 고품질의 비건 레더가 시장에 등장해주길, 그때까지만 있는 가죽들로 버티면 되는 것이길 간절히 바라봅니다🙏